학교 도서관에서는 매주 새로 구매한 신간을 소개하는 메일을 보낸다. 그 중 익숙한 이름 하나를 발견한 것은 몇 주 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교수를 지낸 프리먼 다이슨의 책이 번역된 것이었다.
제목은 "프리먼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 : 과학자의 눈으로 본 인간, 역사, 우주 그리고 신". 사실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다. 20세기 이후 과학자는 보통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흔히 말하는 "지성인"과는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고, 어줍잖게 인간, 역사, 심지어 신에 대해서까지 의견을 피력한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 까닭이다.
목차를 살펴본 후에는 그 느낌이 오히려 더 강해졌다. 책의 전반부는 몰라도, 후반부에 이르면 '외계 문명', '은하계 녹화 사업'등 우주 탐험에 대해 그다지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상당히 내용의 현실성이 의심스러운 표현들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 진행하고 있는 일에 필요한 점이 있어서 KAM 정리로 유명한 구소련의 수학자 Arnold가 쓴 특이점 이론에 대한 책, 그리고 2005년에 ICTP에서 열렸던 특이점 관련 여름학교의 회보를 대출하기 위해 도서관에 갔다가, 다이슨이 썼다는 책의 번역본을 집어들었다.
앞의 절반을 읽은 지금까지의 감상은 한마디로 압권. 과학자가 쓴 책 중에서 이토록 개인적 회상, 특히 자신이 관여한 과학 발전에 대한 이야기, 문학, 예술, 철학에 대해 진지하고 품격높게 쓴 매혹적인 책을 본 적이 없다. 번역은 물리학을 전공했고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등 많은 책을 번역한 전문 번역가인 김희봉씨인데, 옮긴 이의 말에서도 역시 최상의 찬사를 보내고 있는데 나도 거의 동의할 수밖에 없다.
책의 첫 부분은 십대 시절, 과학에 관심을 가졌던 저자가 많은 책들에서 "그 이상을 이해하려면 미분방정식을 공부해야 한다..."등의언급을 계속 발견하자 아인슈타인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미분방정식 교과서를 우편으로 주문하는 데서 시작한다. 아마존에서 검색해 보니 저자가 Piaggio인 이 책은 1920년대에 처음 발간되었으며 거의 매 해 재판을 찍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영국에서는 표준적인 텍스트로 자리잡았던 듯하다. 다이슨에게 운이 좋았던 점은 이 책이 700개가 넘는 연습 문제를 수록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그는 어느 겨울 크리스마스 휴가 - 실제로는 한 달 정도의 겨울 방학 - 동안에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매일 이 책을 붙들고 늘어져서 - 부모님이 건강을 해칠까 걱정할 정도로 - 거의 다 떼었다는 것.
전쟁 후에 다이슨은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 대학교에 있던 한스 베테의 학생이 되는데, 후에 파인먼, 슈윙거, 토모나가가 노벨상을 받게 되는 QED의 정립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3명이 이미 찼기 때문에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만약 독립적으로 아이디어를 낸 토모나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면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 운 좋게도 다이슨은 슈윙거의 표준적인 계산도 따라갈 수 있었고, 혁신적인 파인먼의 아이디어도 긴 토론 끝에 흡수할 수 있었다. 파인먼과 함께 했던 자동차 여행은 이 책에서도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다이슨은 과학의 근본 원리에 대해 깊이 숙고하는 파인먼같은 사람이 가진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고 대신 문제 해결 내지는 좀 더 수학적으로 다듬는 일에 맞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더라도 다이슨이 당시에 슈윙거와 파인먼 양자와 모두 깊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거의유일한 물리학자였다는 뉘앙스를 주는 것을 보면 역시 홀로 수련을 쌓는 시간과,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의 적당한 균형이 성공적인 (적어도 이론물리) 연구에 대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다.
다이슨은 영국인으로 종전후에 미국으로 와 로스 알라모스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많은 물리학자들과 교류했다. 특히 결국 오펜하이머가 소장으로 있던 고등연구소의 교수가 되었으므로 "오피"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원자력의 이용에 대하여 큰 목소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물리학자들 - 오펜하이머, 텔러, 베테 등에 대한 이야기가 실화다운 많은 반전과 함께 소개되어 흥미진진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오펜하이머의 운명에 대한 비유로서 1936년에 발표된 희곡 (정확하게는 극시 - poetic drama) "The ascent of F6"을 소개한 것이다. 물론 이 희곡이 발표된 것은 2차대전이 발발하기도 몇 년 전인데, 당시 유럽에 도는 전운으로 해서 묵시적 문학 작품이 여럿 나왔다고 해도 이 희곡의 주인공인 등반가, 그리고 그의 등반대와 오펜하이머, 그리고 그가 이끌던 로스 알라모스의 과학자들 팀의 운명을 비유한 것은 절묘했다. 참고삼아, 1950년대 당시 아인슈타인 사후 가장 영향력있는 원로 물리학자였던 닐스 보어는 연극에서 주인공이 등반을 시작하기 전 예언을 위해 찾아가는 수도원장에 비유된다.
후반부는 원자력 발전, 우주 여행 등에 대한 다이슨의 의견이 강하게 드러나서 1부보다는 흥미가 좀 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를 사이에 둔 미묘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텔러와 우정을 쌓게 되는 계기에 등장하는 바하의 평균율 중 프렐류드 내림마 단조, 프린스턴에서 그가 만날 기회가 있었던 T.S.엘리엇과 역시 그의 희곡인 Murder in the Cathedral 같은 다양한 문학 작품의 적절한 인용이 책을 읽는 재미를 극대화시킨다.
제목은 "프리먼 다이슨, 20세기를 말하다 : 과학자의 눈으로 본 인간, 역사, 우주 그리고 신". 사실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다. 20세기 이후 과학자는 보통 자신의 전문 분야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흔히 말하는 "지성인"과는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고, 어줍잖게 인간, 역사, 심지어 신에 대해서까지 의견을 피력한다는 것은 그리 좋은 일이 아니라고 믿고 있는 까닭이다.
목차를 살펴본 후에는 그 느낌이 오히려 더 강해졌다. 책의 전반부는 몰라도, 후반부에 이르면 '외계 문명', '은하계 녹화 사업'등 우주 탐험에 대해 그다지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상당히 내용의 현실성이 의심스러운 표현들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 진행하고 있는 일에 필요한 점이 있어서 KAM 정리로 유명한 구소련의 수학자 Arnold가 쓴 특이점 이론에 대한 책, 그리고 2005년에 ICTP에서 열렸던 특이점 관련 여름학교의 회보를 대출하기 위해 도서관에 갔다가, 다이슨이 썼다는 책의 번역본을 집어들었다.
앞의 절반을 읽은 지금까지의 감상은 한마디로 압권. 과학자가 쓴 책 중에서 이토록 개인적 회상, 특히 자신이 관여한 과학 발전에 대한 이야기, 문학, 예술, 철학에 대해 진지하고 품격높게 쓴 매혹적인 책을 본 적이 없다. 번역은 물리학을 전공했고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 등 많은 책을 번역한 전문 번역가인 김희봉씨인데, 옮긴 이의 말에서도 역시 최상의 찬사를 보내고 있는데 나도 거의 동의할 수밖에 없다.
책의 첫 부분은 십대 시절, 과학에 관심을 가졌던 저자가 많은 책들에서 "그 이상을 이해하려면 미분방정식을 공부해야 한다..."등의언급을 계속 발견하자 아인슈타인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 미분방정식 교과서를 우편으로 주문하는 데서 시작한다. 아마존에서 검색해 보니 저자가 Piaggio인 이 책은 1920년대에 처음 발간되었으며 거의 매 해 재판을 찍은 것으로 보아 적어도 영국에서는 표준적인 텍스트로 자리잡았던 듯하다. 다이슨에게 운이 좋았던 점은 이 책이 700개가 넘는 연습 문제를 수록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그는 어느 겨울 크리스마스 휴가 - 실제로는 한 달 정도의 겨울 방학 - 동안에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매일 이 책을 붙들고 늘어져서 - 부모님이 건강을 해칠까 걱정할 정도로 - 거의 다 떼었다는 것.
전쟁 후에 다이슨은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 대학교에 있던 한스 베테의 학생이 되는데, 후에 파인먼, 슈윙거, 토모나가가 노벨상을 받게 되는 QED의 정립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3명이 이미 찼기 때문에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만약 독립적으로 아이디어를 낸 토모나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면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 운 좋게도 다이슨은 슈윙거의 표준적인 계산도 따라갈 수 있었고, 혁신적인 파인먼의 아이디어도 긴 토론 끝에 흡수할 수 있었다. 파인먼과 함께 했던 자동차 여행은 이 책에서도 자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다이슨은 과학의 근본 원리에 대해 깊이 숙고하는 파인먼같은 사람이 가진 능력이 자신에게는 없고 대신 문제 해결 내지는 좀 더 수학적으로 다듬는 일에 맞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더라도 다이슨이 당시에 슈윙거와 파인먼 양자와 모두 깊이 이야기를 나누었던 거의유일한 물리학자였다는 뉘앙스를 주는 것을 보면 역시 홀로 수련을 쌓는 시간과,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시간의 적당한 균형이 성공적인 (적어도 이론물리) 연구에 대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닌가 싶다.
다이슨은 영국인으로 종전후에 미국으로 와 로스 알라모스 프로젝트에 참가했던 많은 물리학자들과 교류했다. 특히 결국 오펜하이머가 소장으로 있던 고등연구소의 교수가 되었으므로 "오피"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원자력의 이용에 대하여 큰 목소리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물리학자들 - 오펜하이머, 텔러, 베테 등에 대한 이야기가 실화다운 많은 반전과 함께 소개되어 흥미진진하다.
가장 놀라운 것은 오펜하이머의 운명에 대한 비유로서 1936년에 발표된 희곡 (정확하게는 극시 - poetic drama) "The ascent of F6"을 소개한 것이다. 물론 이 희곡이 발표된 것은 2차대전이 발발하기도 몇 년 전인데, 당시 유럽에 도는 전운으로 해서 묵시적 문학 작품이 여럿 나왔다고 해도 이 희곡의 주인공인 등반가, 그리고 그의 등반대와 오펜하이머, 그리고 그가 이끌던 로스 알라모스의 과학자들 팀의 운명을 비유한 것은 절묘했다. 참고삼아, 1950년대 당시 아인슈타인 사후 가장 영향력있는 원로 물리학자였던 닐스 보어는 연극에서 주인공이 등반을 시작하기 전 예언을 위해 찾아가는 수도원장에 비유된다.
후반부는 원자력 발전, 우주 여행 등에 대한 다이슨의 의견이 강하게 드러나서 1부보다는 흥미가 좀 떨어질 것 같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를 사이에 둔 미묘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텔러와 우정을 쌓게 되는 계기에 등장하는 바하의 평균율 중 프렐류드 내림마 단조, 프린스턴에서 그가 만날 기회가 있었던 T.S.엘리엇과 역시 그의 희곡인 Murder in the Cathedral 같은 다양한 문학 작품의 적절한 인용이 책을 읽는 재미를 극대화시킨다.











덧글
키키 2009/04/18 03:55 # 답글
Disturbing the Universe나 Gifford Lecture를 책으로 낸 Infinite in All Direction 등도 재밌고, 내용도 아마 일부 겹칠 것입니다. Origins of Life 도 ..
루이 2009/04/18 09:50 # 답글
그럴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도 이미 발표된 글들을 묶은 부분도 있다고 이야기한 것 같아요.